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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죽은 블로그나 다름 없는 이 곳,
가끔 검색에 걸려서 들어오시는 분들이 있는데
아니
간만에 블로그가 제대로 인터넷 상에 존재하긴 하나 하고 확인하러 들어왔더니 검색어 중에 '친하다고해서 다 이해할 줄 알았냐'라는 키워드가 있네요.
아 뭐죠; 꼭 나에게 보내는 메시지같은 이런 검색어는 무엇을 찾으려고 검색했던 건가요?
Posted by 두부야

아베코보 <<모래의 여자>>

1. 탁월한 대비

영원히 자신의 이름을 남기기 위해 자신의 이름을 딴 새로운 희귀종을 찾으러 간 곤충 채집가 - 그 욕망을 달성하기 위해 찾은 모래 언덕에서 실종되어 오히려 자신의 이름이 말소되다.

그 곤충은 길앞잡이속: 현란한 움직임으로 먹이를 유인해 결국 가둬두고 잡아먹는다. - 길앞잡이속의 변종을 찾으러 간 남자, 그리고 결국 그 사구에서 길을 잃은 남자.

 바깥 사회에서는 다른 세계로의 휴가를 꿈꾸고 - 모래 속에서는 끊임없이 바깥을 희구하다. (뫼비우스의 띠)

 바깥에서는 남을 가르치는 직업이었던 남자(교사) - 모래 속에서는 생존을 위해 무기력하게도 부락 사람들의 요구는 모두 들어주어야 한다.

 끊임없이 유동하는 모래 - 그 모래에 갇혀서 나갈 수 없는 남자
:모래 자신은 끊임없이 움직이면서도 사람은 가라앉히고 붙잡아둔다.

 나가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던 남자가 - 탈출 실패 후 자신의 목숨을 살려달라며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해주겠다고 구걸한다.

 2. 중요한 것은 결국 남자가 자신의 부조리한 상황에 순응한다는 것. 익숙해져서 쉽게 나갈 수 있는 기회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탈출 계획은 내일도 세울 수 있다며 일단 자신의 생활에 골몰한다. (그가 골몰하는 모래의 모관현상을 이용한 集水는 그가 내려진 사다리를 올라타고 가 바깥 세상으로 가면 해결될 문제)이는 마치 유리병 안에 가둬둔 개구리는 시간이 지나고 유리병을 치운 후에도 꼭 그 유리병만큼의 높이까지밖에 뛰지 못한다는 얘기와 비슷하다. (개구리든 벼룩이든 메뚜기든 유리병이든 유리천장이든 어쨌든)

3. 전체적인 감상
긴장감있는 서사로 단숨에 읽힌다. 특히 탈출장면에서는 결말부터 보고싶을 정도. 그러나 중간중간 남자의 회상 혹은 상념등은 따라가기가 벅찰 때가 있다. 나의 역량 부족이겠지만. 일본의 카프카라던데 사실 카프카보다는 쉬운 것 같다. 주제의식이 쉽다기보다는 이야기 구조가 쉽게 읽힐만한 구조라는 것. 아마 주제의식적인 면에서 카프카와 비교되는 것이겠지만. 그건 그렇고 자신이 제2의 XX라고 불리는 건 어떤 기분일까. 아류라고 생각되어 기분이 언짢을까 혹은 대가와 비교해준다니 영광이라고 생각할까. 혹은 둘다?

Posted by 두부야

  나는 다른 사람을 이해한다는 일이 가능하다는 것에 회의적이다. 우리는 대부분 다른 사람들을 오해한다. 네 마음을 내가 알아, 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네가 하는 말의 뜻도 나는 모른다, 라고 말해야만 한다. 내가 희망을 느끼는 건 인간의 이런 한계를 발견할 때다. 우린 노력하지 않는 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이런 세상에 사랑이라는게 존재한다. 따라서 누군가를 사랑하는 한, 우리는 노력해야만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위해 노력하는 이 행위 자체가 우리 인생을 살아볼 만한 값어치가 있는 것으로 만든다. 그러므로 쉽게 위로 하지 않는 대신에 쉽게 절망하지 않는 것, 그게 핵심이다.

김연수, 작가의 말, <<세상의 끝, 여자친구>>



  소통이라는 것은 나를 표현하는 일이며, 상대의 표현을 이해하는 일이며, 너와 내가 한 공간 한 시간에서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일이다. 그리고 이는 곧 내가 이 세상에서 혼자가 아님을 확인하는 과정과도 같고,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첫걸음이기도 하다. 물론 김연수의 말처럼 사람이 다른 사람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힘들다고 생각한다. 어차피 상대방의 모습, 목소리, 말의 내용 모두 나의 눈과 귀를 통해서 인식되는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필연적으로 자신이 개입될 수 밖에 없다. 그렇지만 이러한 사실들이 상대방을 이해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완전히 차단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통하고자 하려는 노력이며, 그 과정에서 느끼는 '소통의 가능성'이다. 이렇게 노력하는 한  '내가 너를 완전하고도 온전하게 이해했는가, 너를 오해했는가' 그 결과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게 된다. 요컨대 누군가와 사랑하며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내가 너를 완전히 이해했는가'의 결과적인 측면에서가 아니라 '나는 너를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는가'의 과정의 존재 여부로 결정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 사회에 배태되어 있는 한,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의존적인 존재인 한, 우리는 타인과 소통해야 하며 타인의 고통과 기쁨을 이해하고자 노력해야한다.
  안타까운 것은, 혹은 기억해야 할 것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곧 '소통'은 아니라는 것이다.  대학교에 입학해서부터 계속 된, 어떤 모임에 갔다 올 때면 나는 늘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외로움 때문에 너무도 괴로웠었다. 분명 친하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인데, 모임에서는 함께 깔깔대며 웃었는데, 나 혼자 집에 돌아오는 길에서는 마치 이 우주에 고독하게 나만 홀로 남겨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그런 기분이 들면 밤 늦은 시간, 집에 돌아와서도 헛헛한 마음을 가눌 수가 없어 잠에 들지도 못하고 책을 보지도 못하고 내내 안절부절하다가 그렇게 두어시간이나 지난 후에야 겨우 마음을 추스리고 잠을 잘 수 있었다. 이 문제에 대해서 내내 '왜 그럴까, 난 뭐가 문제인걸까'하며 고민했었지만 명쾌한 대답은 찾을 수 없었는데, 2009년의 끝 자락에 김연수의 소설이 그 문제 해답의 실마리를 알려주었다. 그래, 난 한번도 그들과 '소통'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난 그들을 진심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았고, 물론 그들도 나와 진심으로 이야기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서로의 신변잡기를 캐내 다른 사람에게 옮기는데 바빴고, 거기에서 말초적인 즐거움을 찾는데만 골몰했다. 나의 말이 상대방에게 닿지 않고 나에게 다시 돌아오는 그런 자리에서 소통할 수 있을리가 만무했다. 우리는 서로 모여서 자신을 배설하기에 급급했고 소통하려는 노력은 아무도 하지 않았다. 실컷 떠들다가 일어난 자리에는 먹다 남은 안주와 술, 그리고 서로에게 닿지 못하고 허공에 떠돌아다니는 각자의 말들만이 남아있었을 뿐이었다. 몇 시간이고 자신을 실컷 배설한 후에 돌아오는 길이 충만할 수는 없는 법이다. 나의 그 외로움들이 이렇게 간단한 이유였다니.
 
  글쎄, 내가 그들과 다음에 만났을 때, 나의 외로움의 근원을 해소하기 위해 그들과 진정한 소통을 하려는 노력을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그 모임은 늘 그래왔던대로 서로의 신변잡기를 읊는데에 관성이 생겼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적어도 나의 문제의 근원을 몰랐을 때보다는 뭔가 나아질 수 있지는 않을까. 설령 더 나아질 수 없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이 소통의 부재에서 오는 외로움은 덜어지지 않을까. 이런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와 '소통'을 위해 노력하고 서로에게 다가가 우리가 한 공간, 한 시간에 존재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또 아무와도 소통할 수 없는 이 공간에서 허공에 대고 말한다.

Posted by 두부야